[길 위의 인문학]

원효와 요석공주 전설이 서려 있는 소요산 
경기의 대표 명산으로 단풍과 진달래 빼어나

조경렬 편집장

경기 동두천시의 소요산으로 자재암으로 오르는 원효대 앞의 해탈문(사진=헤럴드저널)

신록의 오월 마음이 소요逍遙하여 소요산을 찾았다. 수도권 전철로 이동이 편리한 소요산은 남녀노소 많은 탐방객들이 찾아든다. 춘삼월이 지나고, 사월의 청명 한식 지나고, 곡우穀雨가 되니 진달래는 지고 산철쭉이 피어난다. 동두천 소요산은 서울 보다는 기온이 낮아 꽃피는 시기가 조금은 늦나 보다.

소요산 진달래 산행은 산을 즐겨 찾는 산우(山友)와 함께 하기로 했다. 봄에는 누구나 마음의 기운이 상승하기 마련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니 우리 인간도 즐거운 마음으로 봄을 맞아야 하지 않을까. 수도권 전철 1호선 소요산역을 나서면서 수많은 인파에 몸을 맡긴다. 봄날의 주말인지라 산행객들로 인산인해다. 모두들 서로의 친목과 사랑과 우정을 나누며 산행을 할 것이다.

필자는 많은 인파에서 살짝 비켜선다. 코스를 일주문 쪽으로 잡지 않고 팔각정 쪽으로 오르기로 했다. 인파를 피하고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게 더 한적한 꽃길을 거닐 수 있기 때문이다. 소요산을 자주 찾는 이들은 이 코스를 선호한다.

팔각정 모퉁이에서 하백운대까지 능선 길을 따라 걷는다. 일주문 쪽으로 오르면 인파도 많지만 자재암에서 하백운대로 오르는 코스가 매우 가파르기 때문에 숨이 컥컥 막힌다. 이렇게 소요산 능선들을 한 바퀴 돌면 종주가 되고, 가다가 힘이 들면 나한대 쯤에서 자재암 하산 길로 내려서면 그만이다.

진달래는 지고 산철쭉이 한창이다(사진=헤럴드저널)

중백운대로 오르는 길에 핀 연분홍의 산철쭉

김시습이 '소요하였다'하여 소요산

산수가 좋아 아름다운 풍광에 취해 가만가만히 걸어서 도착한 곳 소요산. 소요산逍遙山(559m)은 작은 육산이지만 풍치가 수려하다. 경기 북부 동두천시에 속하는 소요산 자락은 길쭉한 박바가지 모양의 원형으로 능선을 펼치고 있다.

서화담과 매월당이 ‘자주 소요하였다’하여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 산은 작지만 산세가 유별나다. 하백운대(440m), 중백운대(510m), 상백운대(559m), 나한대(571m), 의상대(587m), 공주봉의 여섯 봉우리가 타원형을 이룬다.

주봉은 상백운대 이지만 가장 높은 봉우리는 587m의 의상대이다.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이 장관을 이루며, 여름에는 녹음과 폭포가 어우러지고, 가을 단풍은 그 빛깔이 빼어나 예부터 경기의 소금강이라 불렸다. 산의 높이에 비하여 숲이 우거지고 수량도 풍부하다.

뾰족뾰족한 기암괴석이 절묘하게 직벽 봉우리를 이루어 만물상을 연상케 한다. 특히 중백운대는 직벽이 매우 높아 출입을 막고 있다. 일주문에서 자재암, 백운대로 오르는 계곡은 암봉과 바위능선 사이로 골짜기가 협곡을 이루고 있으며 급경사를 연출해 옥류폭포, 원효폭포 등 폭포가 장관이다.

협곡 사이의 자재암은 원효가 관음보살의 현신을 친견한 곳이라고 한다. 그가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은 후 전국을 떠돌다가 노구(老軀)를 이끌고 심산유곡(深山幽谷)인 이곳으로 들어와 수행했던 기도처이다. 이왕 요석공주와 원효대사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들의 설화를 들어보자.

중백운대 절벽에 자라고 있는 소나무(사진=헤럴드저널)

중백운대의 직벽 낭떠러지 위에 자라고 있는 천년송 소나무가 일품이다(사진=헤럴드저널)

요석공주와 원효대사의 만남 그리고 공주봉

소요산에는 곳곳에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설화가 서려 있다. 요석공주가 머물렀다는 별궁 터와 원효가 수도했다는 원효대도 있고 최고봉인 의상대 옆으로는 공주봉이 있다. 하백운대에서 시계방향으로 완주 산행을 할 경우 마지막 봉우리가 공주봉이다.

일설에 의하면 원효가 자신을 사모하는 요석공주를 위해 이 봉우리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이 공주봉에 오르면 남동방향으로 시계가 확 트이면서 멀리 동두천역과 보산동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는 데크가 설치되어 있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식사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에 좋다. 이렇게 소요산 하면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로맨스로 잘 알려진 곳이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알고 나면 요석공주에 대한 애틋함과 비애감이 앞선다.

신라의 원효대사(617~686)는 당나라로 첫 유학을 떠난다. 34세 때인 650년(진덕여왕4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고승 현장에게 불법을 배우러 가다가 요동에서 고구려의 국경경비대인 순라군에게 붙잡혀 첩자로 오인 받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뜻을 버리지 않은 원효는 10년 후인 661년(문무왕1년) 다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백제 땅 당항성 근처에서 날이 저물어 한 동굴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달게 마신 물이 다음날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바가지에 담긴 썩은 물이었다.

원효는 깜짝 놀라 토하다가 문득 "마음이 나야 모든 사물과 법이 나는 것이요, 마음이 죽으면 곧 해골이나 다름이 없다[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龕墳不二]. 부처님 말씀에 삼계三戒가 오직 마음뿐이라 한 것을 어찌 잊었더냐?"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진리를 깨달아 유학을 포기하고 신라로 되돌아온다.

세상의 모든 사유는 마음속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원효대사. 그 뒤 분황사에 있으면서 민중불교로 통불교(通佛敎)를 제창하며 민중 속의 불교전파에 나서기 시작한다.

주봉인 상백운대 주변에 핀 산철쭉

원효, 자루 없는 도끼를 찾다

그럼 원효가 신라로 돌아와 요석공주와 인연은 어떻게 맺게 되었는지가 궁금하다. 원효는 이후 거지 행세를 하며 전국 각지를 떠돌면서도 사찰과 암자를 백 여 곳이나 창건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러던 원효가 갑자기 대중을 향해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단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것인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誰許沒柯斧爲斫支天柱]라고 해괴망측한 말을 퍼뜨리고 다녔다.

자재암

그러나 민중들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으나 이 소문은 궁궐에까지 들어가 신라 무열왕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무열왕은 가만히 의미를 헤아리니 ‘원효가 아마도 귀한 집 규수를 찾아 아들을 낳으려 하는구나. 아비를 닮아 태어나면 큰 인물이 될게 틀림없겠구나!’하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자루 빠진 도끼는 '과부'를, 하늘을 받칠 기둥은 큰 '인재'를 의미한다. 그 때 임금은 문득 오래전 백제와의 전쟁에 나갔다가 부마가 전사해 요석공주가 요석궁에 갇혀 홀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혼인한지 사흘 만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가 된 공주가 그 '자루 빠진 도끼'라는 생각에 미쳤다.

원효는 당대의 학식이 뛰어난 대사인지라 공주도 이미 그를 흠모해 거지꼴로 다니는 모습을 보고 승복과 모란꽃 선물을 하기도 했던 터였다. 이런 정황을 안 임금은 호위군에 명령을 내려 원효를 궁궐로 불러들이게 했다.

그리고는 요석공주에게 요석궁에서 후한 대접을 하도록 했다. 원효는 요석궁에서 요석공주와 함께 꿈같은 사흘을 머물고 떠난다. 그 후 공주는 설총을 낳는다. 원효는 전국을 다니며 민중불교를 외치다가 고희(古稀)가 다 되어서야 한적한 소요산 지금의 자재암 자리에서 수도생활을 하게 된다.

이 때 원효대사가 수도를 하고 있는데 예쁜 심마니 아가씨가 찾아와 하룻밤 재워줄 것을 요구하며 유혹하니 "마음이 생하면 옳고 그르고 크고 작고 깨끗하고 더럽고 있고 없는 모든 법이 생기는 것이요, 마음이 멸하면 상대적 시비의 법이 없어지는 것이니 원효에게는 자재무애의 힘이 있노라"라고 설법을 했다.

원효대사가 기도하다 '자재무애'를 깨달아 자재암을 지었다(사진=헤럴드저널)

그때 원효는 그 심마니 처자가 관세음보살의 현신임을 깨닫고, 그곳에 암자를 세우고 자재무애自在無碍의 수행을 했다는 뜻에서 암자를 '자재암自在庵'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때 까지도 요석공주는 소요산 입구에다 별궁을 짓고 대사를 흠모하면서 아들 설총과 함께 자재암을 바라보며 평생을 지낸다.

요석공주는 단 사흘만을 지아비로 보낸 대사를 평생 잊지 못하고 일편단심 변함없는 사랑의 애절함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요석공주 별궁 터가 소요산 입구에 지금도 표지 되어 있다. 공주의 아들 설총은 당대의 대학자로서 우리나라 최초의 문자 '이두吏讀'를 만든 사람이다.

오석공주가 살았다는 별궁 터

백년은 되었을 병풍바위 소나무 일품

이렇게 산길을 소요하며 걸으면서 그 산에 얽힌 전설과 야화를 살피며 사색에 잠기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길 위의 인문학'이다. 필자도 하백운대에서 상백운대까지 지천으로 핀 두견화를 보면서 완보로 소요하며 걷는다.

소요산을 찾은 필자

상백운대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칼바위 능선이다. 조금은 험하지만 오밀조밀 칼처럼 뽀족한 바위능선을 타고 넘는 재미가 스릴 만점이다. 칼바위를 지나면 병풍바위에 백년은 족히 넘었을 우람한 소나무가 쌍갈래로 자라고 있다.

필자는 이 소나무를 참 좋아한다. 지나칠 때마다 한 번씩 안아보고 소나무의 기운을 받아 지나가는 버릇이 생겼다. 품위 있고 운치 있는 소나무다.

여기에서 더 걷기에 힘이 부치면 자재암으로 내려갈 수 있다. 더 능선을 타고 돌아가면 나한대와 의상대가 있다. 그 다음 고개를 넘어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공주봉이 기다린다. 나한대로 가는 길 철계단 주변으로 철쭉이 암릉 사이로 앙증맞게 피어났다.

가을이면 단풍도 매우 새빨갛게 물드는 암릉지대다. 병풍바위를 지나면 자재암으로 하산 길은 수목이 우거져 여름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봄이라 산철쭉이 피고, 매화말발도리도 피고 갖가지 봄꽃이 여기저기서 산행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봄 가뭄이 심해 계곡의 수량이 빈약했다. 여름철 장마가 끝나고 8월이 오면 선녀폭포와 선녀탕에 물이 많아 장관을 이룰 것이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애틋한 사랑이야기가 깃든 소요산, 매월당, 서화담, 김삿갓 수많은 시인묵객이 소요했던 소요산을 필자도 소요하며 걸으니 시인이 다된 느낌이다.